
AI로 재정의되는 법무팀의 역할
계약서 한 장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손해배상 조항 하나, 지체상금 산정 기준 한 문장이 수억 원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B2B 계약에서 계약서는 그만큼 중요하다. 거래 금액이 크고, 계약 기간이 길며, 포함하고 있는 항목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 잘못 체결된 계약은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 있다.
계약서의 내용을 검토하는 법무팀은 늘 시간에 쫓긴다. 영업팀에서는 빠른 계약 체결을 독촉하고, 경영진은 리스크 제로를 요구한다. 수십 장의 계약서를 검토하고, 누락된 조항은 없는지, 위험한 표현은 없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가 생길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중요한 조항을 놓치거나, 애매한 표현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AI는 이런 법무 검토 업무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계약서를 10초 만에 분석하고, 위험 정도에 따른 구분을 해줄 수 있다. 과거의 계약서 내용과 비교해서 변경된 조항을 찾아내고, 누락된 필수 조항에 대해서는 표준 문구까지 제안한다. 법무팀은 AI가 1차로 걸러낸 핵심 항목을 위주로 확인하면 된다. 검토 시간은 줄고, 정확도는 올라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계약서·RFP 분석을 가속화하는 AI
RFP 분석에서부터 적용할 수 있다. 제안요청서는 보통 수십 장에서 수백 장에 달한다. 사업 개요, 요구사항, 평가 기준, 제출 서류, 입찰 자격까지 관련된 모든 항목들이 빼곡하게 포함되어 있다. 담당자는 이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면서 준비해야 할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참여할 만한 프로젝트인지, 어떤 부분이 까다로운지, 예산은 적정한지 판단해야 한다. 확인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또 다른 프로젝트의 RFP를 확인해야 할 수도 있다. 모든 문서를 꼼꼼히 읽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AI는 활용한다면 RFP를 몇 분 만에 분석할 수 있다. 핵심 요구사항을 확인하고, 우선적으로 확인할 사항을 정리하고, 위험 요소를 구분한다. "웹사이트 리뉴얼, 반응형 디자인 필수, 6월 30일 마감" 같은 주요 정보를 한 번에 보여준다. 예산 초과 가능성, 불명확한 요구사항 같은 리스크도 미리 알려준다. 담당자는 AI가 정리한 요약본을 보고 빠르게 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AI 기반으로 RFP 분석을 하면 수동으로 진행하는 경우보다 수배 더 많은 대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AI는 과거의 사례 검색을 할 수 있다. 회사의 데이터를 업로드해 놓는다면 유사한 프로젝트를 검색하고, 그때 어떤 전략이 적용되었고 주요 특징은 무엇인지 분석할 수 있다. "전년도에 비슷한 규모의 공공기관 프로젝트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강조한 경우의 수주 성공률이 높았음”는 정보를 제공하도록 할 수 있다.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 가능해진다.
계약서 검토는 법무팀의 핵심 업무다. 우리 회사가 고객사에 전달하려는 계약서나 고객사가 전달해 온 계약서 초안을 받으면 조항 하나하나를 뜯어본다. 불리한 조건은 없는지, 빠진 내용은 없는지 확인한다. 특히 손해배상, 지체상금, 계약 해지 조건 같은 핵심 조항은 더욱 신경 써서 봐야 한다.
AI 계약서 검토는 법률 언어에 특화해 개발한다. 계약서를 업로드하면 기본 정보부터 자동으로 추출해서 계약 언어, 당사자 지위, 계약 기간, 계약 금액, 관할 법원, 대금 지급 기한, 분쟁 해결 방법까지 한눈에 정리한다. 사내 변호사는 세부 내용을 일일이 찾아볼 필요 없이 AI가 정리한 요약본으로 빠르게 계약서 전체를 파악한다. 계약서의 종류에 분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AI 기술은 변호사가 계약서를 생성하는 시간을 대략 절반에 가깝게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위험요소의 확인
더 중요한 건 위험 요소에 대한 확인이다. AI는 표준계약서나 사내 기준과 비교해 위험한 조항을 찾아내는데 탁월하다. 품질 보증, 손해배상, 불가항력 같은 조항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표현이 있으면 경고를 해줄 수 있다. "대리인 권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계약의 유효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라는 식의 구체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다. 위험도에 따라 항목을 구분해서 우선 검토항목을 알려준다.
누락된 조항도 자동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필수 항목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체크리스트에 표시하고, 활용 가능한 표준 문구까지 제안한다. "계약 해지 조건이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문구를 추가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양 당사자는 30일 전 서면 통지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법무 담당자는 AI가 제안한 문구를 검토하고 그대로 적용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수정해서 사용할 수 있다.
과거 계약서와의 비교도 자동으로 진행된다. 같은 고객사와 이전에 체결했던 계약서를 불러와 어떤 조항이 바뀌었는지 자동으로 표시한다. 지체상금률이 기존 0.1%에서 0.25%로 올랐다거나, 계약 기간이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났다는 식의 변경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계약서 작성도 AI로 빨라진다. 표준계약서를 기반으로 고객사의 정보와 프로젝트 조건을 입력하면 계약서 초안을 바로 생성할 수 있다. 계약 목적, 정의, 손해배상, 불가항력 같은 중요 조항이 빠짐없이 들어간다. 물론 초안은 초안일 뿐이고 담당자가 고객사의 특수한 상황, 협상 과정에서 합의된 내용 등을 직접 반영해서 완성해야 한다. 하지만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과 80%가량 완성된 버전의 초안에서 시작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문서 작성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을 계약서 품질 향상에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리스크 관리는 계약 체결 후에도 이어진다. B2B 계약은 보통 수개월에서 수년간 지속된다. 계약 기간 중 조건이 변경되거나, 갱신 시점을 놓치면 문제가 생긴다. 계약이 자동 연장되는 조건인지, 갱신을 원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통보해야 하는지 관리해야 한다. 계약 건수가 많아지면 모든 계약의 만료일과 갱신 조건을 하나하나 관리하기가 어렵다.
AI 시스템은 계약 기한을 자동으로 추적하도록 할 수 있다. 계약 만료 30일 전, 갱신 통보 기한 7일 전에 담당자에게 알림을 보내도록 설정할 수 있다. "A사와의 공급 계약이 2026년 7월 15일 만료됩니다. 갱신을 원하지 않으면 6월 15일까지 서면 통지해야 합니다.". 이런 알림 덕분에 중요한 기한을 놓치는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계약 조건 변경 이력도 자동으로 기록해서 누가 언제 어떤 조항을 수정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해서 분쟁 발생 시 근거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AI가 법무 담당자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계약서 검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최종 확인과 판단이다. 각 조항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불리한지, 협상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인지, 감수할 만한 사항인지는 사람이 결정해야 한다. AI는 위험요소를 찾아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결정은 담당자에게 달려 있다.
특히 협상 국면에서는 인간의 역할이 크다. 계약 조건은 딱 떨어지지 않는다. 고객사는 지체상금률을 높이려 하고, 우리는 낮추려 한다. 양측이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AI는 "표준 계약서에서 지체상금률은 평균 0.15%입니다"라는 데이터를 줄 수 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일정이 타이트하니 0.2%로 합의하되 대신 중간 검수 기회를 한 번 더 달라"는 식의 협상은 사람이 하는 식이다.

AI를 위한 준비
AI를 법무 업무에 도입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AI가 학습할 수 있도록 사내 표준계약서와 체크리스트를 정리해야 한다. 표준계약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도입하면 기대한 효과를 보기 힘들어진다. 업종별, 거래 유형별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두고, 필수 조항과 위험 조항 목록을 체계화해야 한다. 과거 계약서도 데이터베이스에 정리해야 AI가 유사 사례를 찾고 학습할 수 있다.
법무팀 교육도 중요하다. AI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AI를 신뢰하고 어떤 부분은 사람이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AI가 제안한 문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무조건 의심하는 것도 문제다. AI의 강점과 한계를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초기에는 AI 결과를 사람이 한 번 더 검증하는 이중 체크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신뢰도를 높여가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도입 효과는 데이터로 측정해야 한다. 계약서 검토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누락 조항 발견율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계약 관련 분쟁이 줄었는지 추적한다. 처음 몇 달은 기존 방식과 AI 방식을 병행하면서 비교 데이터를 모으는 것도 좋다. 효과가 검증되면 단계적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간다. 처음에는 단순한 공급 계약부터 시작해서, 점차 복잡한 라이선스 계약, 합작 투자 계약으로 확대하는 식이다.
계약서는 B2B 거래의 뼈대다. 잘 쓰인 계약서는 양측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하고, 분쟁 가능성을 줄이며, 안정적인 거래 관계를 만든다. AI는 이 과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의 판단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AI는 법무팀의 든든한 조수지, 결정권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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